의료 산업은 지금까지 병원이라는 물리적 공간과 의사라는 인적 자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전통적 모델 위에서 움직여 왔다. 그러나 최근 급격한 기술 발전과 글로벌 팬데믹의 여파로 의료의 본질 자체가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이제 의료는 더 이상 병원의 벽 안에서만 이뤄지는 서비스가 아니다. 모바일 기기와 원격 플랫폼을 통해 환자와 의료진은 시공간적 제약을 벗어나 상호작용하고 있으며, 의료 소비자들은 스스로의 건강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을 맞이하고 있다.
의료 산업이 점차 데이터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특히 혈압, 맥박, 걸음 수, 수면 패턴처럼 일상생활에서 비침습적으로 수집되는 이른바 ‘Passive Data’와 영상·유전체·병리 정보처럼 의료 현장에서 침습적으로 획득되는 ‘Active Data’의 구분이 중요해지고 있다. 이 분류는 단지 기술적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비즈니스 모델과 가치 사슬이 형성될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Passive Data는 기본적으로 라벨링 작업이 거의 필요 없고, 웨어러블 기기를 통해 자동으로 축적된다는 점이 강점이다. 애플워치를 비롯해 이미 보편화된 디바이스가 있고, 가까운 미래에는 반지나 벨트와 같은 새로운 폼팩터가 출시될 가능성도 크다. 특히 애플은 이러한 웨어러블 생태계를 오랫동안 준비해 왔으며, 사용자가 데이터를 소유하도록 권한을 부여하려는 전략을 택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1) 기기를 파는 회사로서 시장을 더욱 키우고, (2) 데이터 거래가 발생할 경우 중개자로서 수수료를 확보하려는 이중적 의도가 깔려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애플의 독점적 지위를 깨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진단 기기가 등장해야 하는데, 실제로 애플은 연속 혈당 측정 등 혁신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을 인수해 왔으며, 풍부한 캐시플로우를 통해 적당한 경쟁사 기술을 매입해 버리는 선택지도 갖고 있다. 고급화 전략을 통해 프리미엄 시장을 선점한다면, 저렴이 버전 기기가 등장해도 큰 시장 지배력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나온다.
Passive Data는 그 자체로 질병 예방이나 기초 건강 모니터링에서 가치를 발휘한다. 사용자가 손쉽게 건강 이상을 감지하고, 필요한 경우 의사나 AI와 연결되도록 만들어주는 모델이 대표적이다. 또한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개인 맞춤형 광고나 임상시험 후보군을 선별하는 등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최근 급성장 중인 Generative AI가 혈압·맥박·활동량 같은 생활 데이터를 분석해 예방 차원의 조언을 제공해주는 그림도 머지않아 실현될 것으로 보인다.
Active Data는 영상, 병리, 유전체 등 의료 현장에서 전문적으로 얻는 정보를 의미한다. 최근 의료 AI 분야에서 영상 분석이 주목받고 있고, 일부 회사는 PD-L1, PD-1 등 바이오마커를 활용해 암 치료 효율을 높이려고 시도한다. 개인적으로는 유전체 분야가 이른바 ‘꽃’을 피울 것이라 생각한다. 한 번의 유전체 검사만으로도 환자의 위험 질환이나 치료 반응 등을 예측하는 일이 가능해지면, 맞춤형 의료가 한층 더 구체화될 것이다.
기존에는 병리나 영상 데이터를 활용하려면 전문가가 라벨링을 해줘야 했지만, 최근 비지도학습 기법이 발전하면서 라벨링 부담이 줄어들고 있다. 이는 곧 환자가 “내 검사 데이터를 직접 AI 모델에 돌려볼 수는 없을까?”라는 요구를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 시점에서 PHR(Personal Health Record) 플랫폼이 각광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환자가 검사 자료를 손쉽게 반출·관리해, 필요할 때 원하는 곳에 제출하거나 AI 분석을 요청할 수 있다면, 병원 간 중복 검사가 줄고 진료 효율도 크게 높아질 것이다.
문제는 X-ray나 MRI 자료 같은 Active Data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다. 환자가 검사 비용을 지불했으니 환자 소유라는 의견도 있고, 의료행위의 일환이니 병원 또는 의사의 자산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공적 보험이 개입되는 만큼 정부 소유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만약 이 부분을 “환자 소유” 쪽으로 확정 짓고, 환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판매·거래할 수 있도록 한다면, 시장 논리에 따라 의료 빅데이터가 효율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의료 공공성이나 개인정보 보호 문제를 고려하면, 법·제도적 정비가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실제 적용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위 빅5 병원에 데이터가 집중되어 있어, 잠재적으로 방대한 DB를 구축할 여건이 갖춰져 있다. 그렇지만 관련 법률과 해석이 모호해 병원과 기업이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이 때문에 조각난 데이터를 종합적으로 관리·분석하기 어려워, 궁극적으로 환자나 연구기관에도 불이익이 생긴다는 것이다.
결국 Passive Data와 Active Data의 결합이야말로 가장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웨어러블 기기로 확보된 생활 정보와 전문 의료 환경에서 얻은 병리·유전체 정보가 연계될 때, 특정 약물 복용 효과를 추적 관찰하거나, 임상시험 대상을 훨씬 정교하게 선정할 수 있다. 일부 기업은 이를 위해 PHR 플랫폼 기반의 신약 개발 및 바이오 연구 모델을 구상하고 있는데, 여기서 환자의 권리와 제약사의 요구, 정부 규제와 공공성의 상충 지점을 어떻게 풀어낼지가 핵심 변수로 떠오른다.
결론적으로, 의료 산업은 점점 더 데이터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다. 비침습적 방식으로 대량 수집이 가능한 Passive Data가 ‘생활 속 건강관리’를 혁신할 수 있다면, Active Data는 ‘진단과 치료의 정밀화’를 가속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 영역이 서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융합될 때, 개인 맞춤형 의료가 꽃피울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누가 이 판을 주도하고, 누가 데이터를 소유하며, 환자의 권리는 어떻게 보장할지에 관한 것이다. 애플과 같은 빅테크 기업, AI 스타트업, 전통적인 병원·정부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있어, 앞으로의 경쟁과 협력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혁신적인 결과를 낳을지 주목할 만하다.
원격의료의 개념은 2000년대 중반 인터넷 혁명이 이루어지면서 등장하였으나, 실질적으로 한국 내에서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국민의 50% 이상이 수도권에 밀집하여 사는 인구 구조적 특성과, 대중들의 의료 접근성이 높다는 것 등이 한국에서 원격의료에 대한 진전이 크게 없었던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19의 유행과 함께, 보건복지부는 한시적으로 비대면 진료를 허용했고, 이로부터 대한민국 국민의 1/4이 비대면 진료의 수혜를 보았다. 이를 계기로 닥터나우, 메라키플레이스(나만의 닥터)등의 원격진료 회사들이 자리를 잡고 몸집을 키우게 되었다.
필자도 코로나 시절 이러한 비대면 진료 앱을 통해 직접 진료를 받아 본 경험이 있다. 앱에서 원하는 진료과를 입력한 후, 원하는 병원을 골라 증상을 제출하면 몇 분 후 전화가 와서 진료를 보는 구조이다. 이후에는 병원에서 내려준 처방전을 자동으로 약국에 보낸 후, 약이 집 앞까지 배송되었다.
우선, 전체 과정에서 진료 과정은 상당히 아쉬웠다. 사실 전화로만 하다 보니 직접 대면을 했을 때만큼의 생동감이 없었으며, 진료하는 의사가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실제 진찰 과정에서는 문진 후 시진, 타진, 촉진, 청진 등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의사가 환자에 관한 정보를 습득한다. 그러나 전화를 통한 원격진료에서는 문진을 제외한 나머지 정보의 접근이 제한된다. 그래서 필자가 겪은 가벼운 감기나, 탈모/여드름/응급피임약 처방이 현재까지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오히려 효용을 느낀 부분은 약 배송 서비스였다. 심각한 질환이 아니라 여러 번 처방 받은 적이 있어 특이 사항이 없을 때, 약국까지 갈 필요 없이 약을 집앞까지 배달해주는 것은 확실히 시간과 수고를 아껴주는 가치를 제공한다고 느껴졌다. 다만 앞서 언급한 조건들로 인해 이러한 비대면 진료 서비스들은 사실상 온라인 처방 자판기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원격진료는 보건복지부의 정책에 많이 의존한다. 2020년 2월 ~ 2023년 1월 복지부의 팬데믹 특수 원격진료 허용이 끝난 후, 약 배송 서비스는 전면 중단되었으며, 적용대상도 재진 환자와 의료 취약계층으로 급격히 축소되었다. 이후 2023년 12월 개정된 방안으로 초진 환자도 다시 대상에 포함되었지만, 약 배송은 여전히 허용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진료를 온라인으로 받더라도, 직접 약국에 가서 처방전을 제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것이다. 이처럼 원격의료 비즈니스가 팬데믹 이후에 오히려 주목받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기술 부족이 원인이 아니라 규제가 핵심이었으며,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원격의료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원격진료 회사들은 코로나 이후 많은 금액의 투자를 받았다. 그 중 닥터나우는 누적 투자금액이 500억원에 달하지만, 아직까지도 마땅한 비즈니스 모델이 부재한다. 결국 지속적으로 캐쉬번을 하며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플랫폼 기업의 특성 상 많은 사람들을 락인 해두고 수익모델을 찾아야 하지만, 의료 비즈니스의 특성상 이것이 쉽지 않다. 환자가 의사에게 내는 비용에서 수수료를 받는 것은 불법이며, 의료 유통 등의 모델을 시도해보았지만 약사회의 압박에 막혀 이익을 내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나만의 닥터의 경우에는 오히려 한국 원격의료의 필요성에 맞춰 섬이나 벽지에 사시는 의료취약계층에 주목하여 사업을 진행하는 모습이지만, 이 또한 향후 어디서 현금흐름을 만들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결론적으로, 의료산업은 이제 단순한 진료 공간을 넘어 ‘데이터 플랫폼’ 위에서 재탄생한다.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수집되는 웨어러블 기반의 패시브 데이터와 병원 검사실에서 생성되는 액티브 데이터가 결합될 때, 예방에서 진단·치료·사후 관리에 이르는 전 주기적 헬스케어 모델을 구현할 수 있다. 여기에 AI·빅데이터 분석 역량이 더해지면, 개인별 위험 질환 예측부터 맞춤형 치료 전략 제시까지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의료 서비스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혁신이 본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데이터 소유권과 개인정보 보호, 원격의료 규제,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모델이라는 난제를 동시에 풀어야 한다. 환자가 자신의 건강 데이터를 직접 관리·제어할 수 있는 PHR(개인건강기록) 플랫폼이 법제도적 뒷받침 속에 구축되어야 한다. 원격진료와 약 배송 서비스가 의료 취약 계층뿐 아니라 일반 환자에게도 안정적으로 제공될 수 있도록 규제 샌드박스를 확장해야 한다. 병원·스타트업·빅테크·정부가 각자의 전문성을 공유하며 협업 생태계를 조성할 때 기술 개발과 제도 정비가 속도감 있게 이루어진다.
결국 의료산업 대전환의 승패는 누가 더 빠르게, 그리고 더 환자 중심으로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다. 데이터 거버넌스 확립, 규제 개혁, 기술 투자, 환자 권한 강화, 혁신적 비즈니스 모델의 실험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진정한 의미의 ‘데이터 기반 맞춤 의료 시대’를 맞이한다
Gwanhyun Kim